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슬라보예 지젝 (문단 편집) == 지젝에 대한 비판 == >하지만 이러한 지젝의 비판 역시 몇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존재 의의와 실재성, 효력을 토대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 양식(또는 간단히 말하면 경제)으로서의 토대에 준거하면서도, 그러한 토대가 존재하며 자신이 그 토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는 데 있다.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고 산업 노동자를 비롯한 임노동자들은 자본의 의해 착취되는 현실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토대, 경제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 >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매우 구체적인, 또한 매우 미시적인 차원을 밝혀준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론은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탈실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젝은 이데올로기에는 항상 실재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서는 국가도 경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국가와 경제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거대 장치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론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떤 전략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질문해 볼 수 있다. 국가 장치나 경제 제도의 변혁이나 개조의 쟁점들을 구체화하는 전략적 질문들이 없는 정치란 결국 전무 아니면 전부(자본주의의 유지냐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폐지냐)라는 거대하지만 허망한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튀세르의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할 수 있노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버팀목을 무의식적인 향락에 위치시키는 반면, 호명을 넘어서기 위한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것은 사회적 적대의 존재에 대한 의식 내지 자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호명을 넘어서기’란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호명은 그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전면적 포섭과 종속의 작용이 되는 것 아닌가? >---- >진태원, <호명 II: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158&selectCategory_id=1|#]] >지젝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멘토인 라캉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지면이 많지 않으므로 단적으로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지젝은 라캉주의자이며, 더 나아가 라캉 정신 분석을 바탕으로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합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라캉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방금 언급한 다양한 사상을 종합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젝은 라캉,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등을 자신의 논의에 끌어들였지만, 지젝의 이러한 사상 원용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혁명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한 사상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론의 근거로 삼는 다양한 사상적 유산들을 공산주의라는 ‘내용 없는 기표’를 중심으로 짜 맞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br][br]라캉이나 헤겔, 혹은 그 밖의 다른 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공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젝이 라캉 혹은 헤겔,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이해에 기여한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적으며, 상당 부분은 이미 라캉 혹은 프로이트 연구자, 헤겔 연구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내용들을 ‘필요에 따라’, 즉 마르크스-레닌적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취사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매우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진정한 레닌주의자인지도 또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편의주의적으로’ 기존의 연구들을, 심지어 공산주의 이론조차 적절히 짜깁기하는 혼합주의자, 에피고네(Epigone)에 불과하다. 그가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공산주의는 결코 위험하지 않다. 다만 공허할 뿐이다. >----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 11일)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분석학회라든가 현대 영미 철학에선 지젝을 제대로 언급하진 않는다.[* 분석철학이 대륙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긴 해야한다.] 전통적 역사학자들에게 지젝은 역사학을 모르는 '국제적' 지식인이며 주류 철학에서의 평가는 그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현대 영미 철학에서는 지젝이 근거로 삼는 [[자크 라캉|라캉]]은 이미 비주류가 되었으며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도 상극에 있는 코헨과 같은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 외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헤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로버트 브랜덤, [[존 맥도웰]], [[찰스 테일러(철학자)|찰스 테일러]].] 이는 영미 학계가 통계를 이용한 실증적 방법론과 분석 철학을 주류로 하기 때문이며, 마르크스주의 집단 내에서조차 객관에 토대한, 논리상 타당성을 확보한 분파가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들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놈 촘스키]]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92256175&code=970100|무언가 있는 척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극단적인 사례]]'''"로 지젝을 비판했다. 여기에 지젝은 “촘스키는 언제나 ‘실증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 사람만큼 ‘실증적으로’ 틀린 말을 자주 하는 양반도 없는 것 같다”고 역비판했다. [[더 가디언]]에서는 이러한 지젝과 촘스키의 논쟁에 대해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한 영미권의 촘스키와 추상적 질문에 천착하는 대륙 철학의 전통 위에 선 지젝의 대립”이라며 “이론과 이데올로기, 현실의 관계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한 논쟁”이라고 평한 바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92256175&code=970100|@@]] 또한 지젝은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대륙철학]]계에서도 비판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헤겔 해석이나 라캉 해석에서 헤겔주의자나 라캉주의자들에게 지젝이 엄밀하진 못하다고 비판받는다. 그의 논리에는 부정신학을 옹호하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그의 해석이 타당하거나 객관적인지는 논란에 있다.실제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영국]]의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 자본의 시대 - 제국의 시대 - 극단의 시대 4부작을 쓴 그 저자 맞다. "만들어진 전통"의 공저자이기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이름 높은데 한국에서도 잘 팔린다.]은 지젝을 공연자(performer)로 묘사하며 지젝의 좌파적 기획을 비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